영국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 연극…"누구나 자기혐오 순간 있어"
김히어라·김주연·김규남 3인 3색 무대…각기 다른 연출로 차별성
"연습실 외에는 어디에서도 연습할 수 없는 대본이었어요. 수위가 워낙 세서 연습 때마다 '과연 이 대사를 뱉을 수 있을까' 생각하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입 밖으로 뱉어냈죠."
배우 김히어라는 23일 서울 두산아트센터에서 열린 연극 '플리백' 프레스콜에서 이 작품 출연을 결심하고 무대에 오르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고 했다.
그는 "1인극 형식의 공연 자체가 한국에 많이 없기도 하고, 런던에서 시작한 스탠드업 코미디다 보니 한국 문화에 닿지 않을까 고민도 많았다"며 "그래도 빈 무대에 의자 하나만 쓰는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의 공연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너무 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19일부터 한국 관객을 만나고 있는 연극 '플리백'은 영국의 극작가이자 배우인 피비 월러 브리지가 쓰고 연기한 스탠드업 코미디 형식의 여성 1인극으로, 2013년 영국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이후 전 세계적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이다. 2016년엔 TV 드라마로 제작돼 에미상과 골든글로브까지 휩쓸었다.
이번 한국 초연의 제작을 맡은 브러쉬씨어터의 이길준 프로듀서는 "처음 이 작품을 에든버러에서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며 "한국에 이 작품을 올리고 싶다는 생각을 5년 전부터 해 왔다"고 설명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플리백은 런던에서 기니피그 카페를 운영하는 스물여섯살 여성으로,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을 비롯해 가족, 연인 등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극심한 자기혐오와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주인공 이름인 플리백은 영어권에서 '지저분한 사람', '문제투성이' 혹은 '누추한 곳'을 뜻한다. 이름처럼 플리백은 면접 중 상의를 탈의하는 등 충동적인 행동과 실수를 반복하고, 성적인 농담과 음탕한 독백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배우들은 파격적인 성적 수위와 욕설이 담긴 대본에 대한 고충도 전했다.
김주연은 "대본을 받고 악몽까지 꾼 건 이 작품이 처음이었다"며 "진짜 상상조차 못 한 대본이라 어떤 얼굴로 관객들 앞에 서야 할지 고민이 컸다"고 털어놨고, 김규남 역시 "정말 큰 도전이었지만, 연기자로서 캐릭터 변신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류주연 연출은 "사실 저도 처음엔 한국인으로서 충격적이었다. 굉장히 선정적이고 자극적이어서 한국 문화와 맞을까 하는 고민도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선정적인 지점을 특별히 약화하거나 감추지는 않았다. 사랑과 외로움 등 이 인물이 느끼는 감정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서는 김히어라, 김주연, 김규남 세 명의 배우가 각기 다른 무대와 연기로 자신만의 플리백을 선보인다.
류 연출은 배우의 개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음향, 조명, 무대 세트 등을 세 버전으로 각각 따로 제작하는 파격적인 시도를 했다.
그는 "하나의 공연에 세 개의 무대를 연출하는 초유의 경험을 했다. 너무 힘들었지만 그만큼 재밌었다"며 "김히어라는 관객과의 소통에 능수능란해 원작의 스탠딩 코미디 형식과 가장 가깝게 구성했고, 김주연의 무대는 원작과는 가장 거리가 멀지만 드라마성을 더욱 높였다. 김규남은 이 두 가지를 빠르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그에 맞춰 연출했다"고 각 무대의 차이를 설명했다.
실제 이날 시연에선 3인 3색의 무대가 펼쳐졌다. 김히어라는 빈 무대 위에 의자 하나만 둔 단출한 무대에서 연기를 펼쳤고, 김주연은 상대적으로 많은 소품을 사용해 드라마적 효과를 냈다. 김규남은 소품 종류는 의자로 한정하되 다양한 종류의 의자를 사용해 다른 배우들의 무대와 차별성을 뒀다.
배우들과 제작진은 이 작품의 매력은 '솔직함'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류 연출은 "무대 위에서 우리가 관객들과 이렇게 솔직한 이야기들을 나눈 적이 있었나 싶다"며 "가장 밑바닥에 있는 깊은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 때 진짜를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히어라는 "누구나 드러내진 않지만 '플리백' 같은 모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도 사람들 앞에서 멋진 척, 쿨한 척 하지만 자기를 혐오하며 스스로를 어두운 곳에 머무르게 하는 순간도 있기 때문"이라며 "관객들도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상처와 실수, 자기혐오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공연은 9월 6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진행된다.
gahye_k@yna.co.kr